
●지지율 90%의 재출발
“이제는 '핵분단'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한달 전쯤, 몇 잔의 소주가 오간 자리에서 어떤 북한 전문가가 낮은 목소리로 무거운 마음을 토로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실내에서 ‘핵분단’이라는 말의 무게에 무심코 신음했다. 그날의 소주는 여느 때보다 썼다.
‘핵분단’이란 기존 남북 분단에 북한 핵무기가 더해짐으로써, 분단이 보다 고착화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론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3년 4.27은 특별한 날이었다. 이날 판문점 남측 시설 ‘평화의 집’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남북정상이 발표한 ‘판문점선언’에는 사상 처음으로 비핵화라는 단어가 명기됐다.
90년대부터 한반도의 뜨거운 감자였던 ‘비핵화’는 2000년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 결과물인 ‘6.15남북공동성명’에 들어가지 못했고, 2007년 두 번째 정상회담 ‘10.4 공동선언’에서도 “한반도 핵문제 해결”이라고만 가까스로 들어가는데 그쳤다. 그것이 이번에는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확인했다”고 격상된 것이었다.
11년 만의 남북정상회담은 회담 장면만 빼고 전 세계에 생중계로 공개됐다. 그것은 바로 전년까지 김 위원장이 기를 쓰고 신무기 개발을 거듭하던 한반도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김위원장이 탄 리무진을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달리는 코믹한 모습이나, 평양냉면을 두고 “멀다고 말하면 안되겠구나”라며 농담을 던지는 모습, 만찬에선 와인으로 얼굴을 붉히며, 끝날 무렵 프로젝터 퍼포먼스를 문 대통령과 손잡고 지켜보는 김위원장의 모습은 한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날 저녁 일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한 필자는 서울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느낌'을 취재하고 다녔다. "남북 정상이 악수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북한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하는 20대의 얼굴에는 분명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다.
정상회담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문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는 85%를 넘었고, 판문점 선언 지지도 90%에 육박했다. 북한과의 유화적인 대화에 부정적인 보수층의 지지도 70%를 넘었다.
전년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악몽과 북미 간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딛고 4월 27일 한국은 말 그대로 새로운 출발을 했다.

●짧았던 '황금기'
부끄러운 고백이 아닐 수 없지만, 필자는 2018년부터 지금까지, 남북관계와 관련된 어떤 책을 일본어로 계속 쓰고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북한 전문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지금도 취재를 계속하고 있지만 2018년에 진행한 인터뷰는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대북정책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 에센스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고만 표현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도 휴전중인 한국전쟁을 끝내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는 가운데 북한의 비핵화 완료가 있고, 미국 및 유엔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가 있으며, 북·미(북·일) 수교가 있다는 '동시 골(goal)'을 향한 방정식이 된다.
대북 관여(engagement)를 늘림으로써 남북한의 유대를 강화하고 남북연합을 거쳐 통일로 나아가겠다는 ‘햇볕정책’을 구체화시킨 <평화공존・공동번영>의 비전과 함께 한반도에 밝은 미래를 가져다주는 두 날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 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조각이 과거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는 북미 정상회담이다.
판문점선언 이후 세간의 주목도 자연스럽게 여기에 모여졌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으로 표류 위기에 처한 이 회담의 성사를 5월 문 대통령의 '깜짝 방북 회담'이 도왔다.
그리고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앞서 언급한 ‘동시 골’이 확인됐다. 역사는 진전되었고 8월에는“9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결정됐다. 이 시기가 이른바 황금기였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 전문가나 과거 진보정권에서 요직을 역임한 인사들은 모두 희색 만면으로 필자를 맞이해 줬다.
“(통일의 오랜 전 단계로 꼽히는) 남북 연합이 가능한지”, “북한이 비핵화할 것인가”는 질문에는 “두고 봐라, 머지않아 알게될 거다”라고 일본의 프로레슬링 스타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의 명언, “망설이지 말고 가라, 가보면 알 거야”를 방불케 하는 박력 있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조를 이룬 것은 이른바 보수파로 분류되는 전문가들이었다. 박근혜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한 인사는 “북한이 핵무기를 놓겠는가. 속아서는 안 된다"고 필자에게 경고를 서슴지 않았다.
반면 지금은 고인이 된 한 전문가는 “남북관계는 역사적으로 구조화돼 있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주변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남북한의 노력 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대통령의 '용기' 부족?
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평양공동선언' 그리고 '남북군사합의서(서명은 국방부 장관)'를 맺었다.
서명식에서 김정은 위원장 옆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 없는 한반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오늘 한반도 전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위험을 없애기로 합의했습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필자는 이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밤에는 평양시민 15만 명을 앞에 두고 “우리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라고 연설하며, 다음 날에는 북한 '신화'의 일부인 백두산까지 올라갔다.
필자는 이에 머쓱해졌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의 남북관계를 움직이는 힘이 ‘민족심’임을 강하게 느꼈고, 다소 불편한 마음과 동시에 향후에도 한반도 평화를 향해 돌진하겠구나 싶은 기대감도 가졌다.
하지만 이듬해 2월, 큰 틀에서의 합의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넘어갈 문턱에서 북미관계는 엇갈렸다.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것이다. 그 배경에 대해 남측은 당사자가 아니다는 이유로 밝히지 않았고, 북측은 원래 입이 무겁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저명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작년에 쓴 트럼프 인터뷰 모음집 『RAGE 분노』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5개의 핵시설 포기"를 요구했고 김정은은 "최대의 하나(영변핵시설)"를 고집했다고 한다.
결렬 후 김정은의 분노는 문대통령으로 향했다. ‘하나’를 조건으로 미국을 설득해 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때부터 남북관계는 내리막길을 걸어 작년 6월에는 판문점선언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 내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북한에 의해 폭파되기에 이른다.
문 대통령에게는 항상 ‘용기’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전쟁 위기가 한창이던 2017년 광복절에는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북미를 향해 결연히 말했고, 2018년 5월에는 마치 옆집에 놀러가듯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싱가폴 정상회담을 살렸다. 노련한 전직 고위 관리는 이를 보고 "그의 외교력은 김대중 대통령을 넘어섰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문대통령에 대한 비판 또한 ‘용기’에 의해 이뤄졌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끝내 이루지 못한 점이 상징적이다.
다른 저명한 전문가가 이와 관련된 일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을 거쳐 가을에 “개성과 금강산을 재개하라”고 지시했으나 외교부 등이 나서 만류했다는 것. 한 차례 결심한 셈이지만 결국 관철되지는 못했다.
문대통령은 지지율 90%의 절대적인 '고지'를 살리지 못했다. "그때 꼭 개성과 금강산을 열었어야 했다"며 아쉬워하는 하소연은 한국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개성공단도 금강산도 이대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전문가에게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취임 직후 개성과 금강산을 재개했어야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숨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핵분단’은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비핵화가 빠진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핵을 가진 북한의 노예가 되는 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판문점 선언 3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많은 회의와 토론회들이 열렸다. 위의 문장은 26일에 있었던 한 토론회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 달린 댓글이다. 노예라는 표현이 과할 순 있지만 이 물음 자체는 유효하다.
그렇지 않아도 남북한은 70년 이상 대치를 이어오는 과정에서, 국가적 폭력이나 반대자에 대한 낙인 찍기 등의 형태로 사회를 '군사화' 시켜 시민의 안전한 삶을 갉아먹고 있다.
여기에 핵무기가 더해지면 한국은 특히, 그동안 쌓아온 번영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으며 결국 한국 사회를 피로의 극치로 몰아넣을 것이다.
앞서 “북한에 속지 말라”고 필자에 말했던 전문가는 이제, “한국의 핵무장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핵분단’의 현실이다. 아직 시민권을 얻은 말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이다.
『RAGE 분노』에 따르면 김정은위원장은 하노이 회담에 앞서 2018년 크리스마스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전 세계는 머지않은 장래에 저와 각하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두 번째 역사적 회담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
판타지 영화? 적어도 필자의 주위에는 그런 관점에서 ‘남북’과 관련된 일에 임하고 있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는 인물, 북한 인권운동을 하는 인물, 정책 입안에 관여하는 학자, 북한 내부와 접촉하는 기자와 위험을 무릅쓰고 정보를 알려주는 북한 주민들. 모두가 인생의 미션이라고 믿고 성실히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고립되어 겉돌고 있다. ‘판문점선언’ 3주년을 맞은 4월 27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 이라는 구호가 여러 한국 언론을 장식했다.
그러나 지금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지난 3년을 총괄하며 겉돌고 있는 톱니바퀴를 조합해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체제를 -3년 전보다 더 강하게-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정권의 공약 중 하나였던 ‘국민통일협약의 책정’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통일과 남북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흔들리고 다양해진 지금이야말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남북관계의 미래를 둘러싼 진보-보수 간 대화도 문재인 정부 들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한국의 역사는 이어지겠지만 다시는 어떤 대북정책이 90%의 지지를 얻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60%라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국 사회에서 남북관계 가치관을 공유하는 과정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가 ‘핵분단’이라면 조상들과 아이들을 볼 낯이 없다. 앞으로 몇 년이 ‘핵분단’과 '진정한 평화'를 가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시점이다.

